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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ruth

좋은 말 + 좋은 말 = 좋은 말

'26.03.11(수) 주님 바라보기

평카박 2026. 3. 1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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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과 함께하는 나의 하루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12).

- 다산, 어른의 하루

천지존야 미상불호천야 서얼지부득부모 기부모자 하이재(未嘗不呼天也 庶孽之不得父母 其父母者 何以哉, 여유당전서).

해석: 하늘은 높지만 하늘이라 부르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 서얼이 자기 부모를 부모라 부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 평카박의 다짐

사람의 일 속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바라보아야 한다.

- ChatGPT

서 있는 자리의 착각, 부를 수 없는 이름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12)
이 문장은 단순히 “조심하라”는 생활 조언을 넘어, 인간이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순간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경고처럼 들립니다. ‘선 줄’이라는 말 속에는 안정감, 정당함, 우월감 같은 감정이 함께 묻어납니다. 지금 내가 옳고, 괜찮고, 충분히 단단하다고 믿는 마음. 그런데 성경은 그 마음이야말로 가장 미끄러운 발판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1) ‘서 있다’는 감각이 만드는 그림자

사람은 누구나 흔들리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붙잡아 둘 이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위, 성취, 평판, 소속, 신념 같은 것들로 “나는 서 있다”는 감각을 세웁니다. 문제는 그 감각이 어느 순간 ‘기둥’이 아니라 ‘벽’이 된다는 점입니다. 벽이 생기면 시야가 좁아지고, 타인은 작아집니다. 그러면 넘어짐은 단지 실수나 실패가 아니라, ‘자기 확신이 만든 사각지대’에서 오는 붕괴가 됩니다.

고린도전서의 경고는 바로 그 지점을 찌릅니다. 넘어짐은 특별한 악인에게만 오는 벌이 아니라, “나는 괜찮다”라는 확신이 지나치게 단단해진 사람에게도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2) 하늘은 부르는데, 부모는 부르지 못하게 한 사회

두 번째 문장은 정약용(여유당)의 글 「서얼론(庶孽論)」에 실린 대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늘은 가장 높으니 일찍이 하늘이라 부르지 않은 적이 없고, 임금은 가장 높으니 일찍이 임금이라 칭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 서얼은 부모를 얻지 못하니, 그 부모란 대체 무엇이기에 그러한가?”라는 흐름으로 읽힙니다.

여기서 핵심은 ‘실제로 부모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가 어떤 이들에게는 부모를 부모라 부를 권리, 즉 인정받을 자격을 제한했다는 문제의식입니다. 정약용은 하늘과 임금처럼 누구나 자연스럽게 부르는 이름이 있는데, 왜 어떤 사람에게는 가장 근본적인 관계의 이름—아버지, 어머니—가 금지되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단지 조선의 신분제 비판에 머물지 않습니다. ‘부를 수 있는 이름’과 ‘부를 수 없는 이름’이 갈라지는 순간, 인간의 존엄은 조용히 흠집 납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건 관계를 승인한다는 뜻이고, 관계를 승인받는다는 건 그 사람이 세상에서 “서 있을 자리”를 갖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3) 자리와 관계, 그리고 겸손

고린도전서의 말이 “서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내면의 경고라면, 「서얼론」의 문장은 “누군가를 서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를 당연시하지 말라”는 사회적 질문처럼 들립니다. 둘을 포개면 하나의 중심 주제가 떠오릅니다.

‘서 있음’은 내가 혼자 세우는 탑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는 관계 위에서만 온전해진다.

내가 “나는 서 있다”고 말하는 순간, 그 말이 타인을 밀어내는 근거가 되면 이미 균열이 시작됩니다. 정약용이 묻는 “그 부모란 무엇이기에?”는, 결국 “그 자격이란 무엇이기에?” “그 경계선은 무엇이기에?”라는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우리가 쥔 기준이 너무 쉽게 누군가를 ‘밖’으로 밀어내지는 않는지, 그리고 그 기준을 쥔 내가 정말 안전한지—성경의 경고는 그 지점을 다시 두드립니다.

4) ‘넘어짐’이란, 높음에서만 생기는 게 아니다

넘어짐은 꼭 높은 자리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낮은 곳에서도 사람은 넘어집니다. 다만 이유가 달라집니다.

  • 어떤 사람은 높아 보이는 자리 때문에 넘어집니다. 자만, 확신, 무감각이 발을 헛디디게 합니다.
  • 또 어떤 사람은 서 있을 자리 자체가 박탈되어 넘어집니다. 관계의 인정, 이름의 권리, 소속의 안전망이 없어서 무너집니다.

두 문장은 각각 그 두 종류의 넘어짐을 보여주면서, 결국 같은 곳을 향합니다. “조심하라”는 말이 단지 개인의 도덕적 긴장만이 아니라, 타인의 자리를 지켜주는 윤리로 이어져야 한다는 지점입니다. 나의 겸손은 타인의 존엄을 살리는 방식으로 증명됩니다.

오늘은 신분제가 사라졌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부를 수 없는 이름’은 다른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가족 안에서, 조직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온라인의 여론 속에서—누군가는 정당한 목소리를 “그럴 자격이 없다”는 한마디로 잃습니다. 반대로 누군가는 “나는 옳다”는 확신으로 상대를 단정하고 몰아붙입니다.

그래서 두 문장이 함께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내가 서 있다고 믿는 순간, 더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자리 때문에 누군가가 앉아야 한다면, 그 자리의 의미부터 다시 물어야 한다.

하늘을 부르는 입술은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람으로 부르는 일, 가족을 가족으로 인정하는 일, 공동체에서 서로에게 설 자리를 내어주는 일은 훨씬 어렵습니다. 그 어려움을 회피하는 순간, 개인도 공동체도 함께 미끄러집니다.

- 이미

아슬한 발끝 위에서도, 진짜 버팀목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겸손과 서로를 품는 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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