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과 함께하는 나의 하루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골로새서 1:25).
- 다산, 어른의 하루
중자지선야 용자능구야 지선이능구 즉 중용야 (中者至善也 庸者能久也 至善而能久 則 中庸也, 심경밀험).
해석: 중은 지극히 선한 것이고, 용은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지극히 선하면서 오래 할 수 있으면 중용이다.
- 평카박의 다짐
중용의 바탕은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믿음이다.
- ChatGPT
맡겨진 사명과 중용: “말씀을 이루는” 오래가는 섬김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자신을 “교회의 일꾼”이라고 부르며, 그 이유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골 1:25)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열심’ 그 자체가 아니라, 위임받은 사명이 공동체를 향해 흘러가며 말씀의 뜻이 드러나도록 자신의 삶을 내어주는 태도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 고백이 단지 개인의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누군가를 “위하여” 구체적인 책임과 방향을 갖는 순간, 신앙은 ‘말’이 아니라 ‘사역(섬김)’이 됩니다.
흥미롭게도 『심경밀험』 문구는 다른 언어로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 가장 선한가? 그리고 무엇이 오래가는가? 그 답을 “가장 선하면서도 오래 지속되는 길”로 묶어 중용이라 부릅니다. ‘중(中)’은 단순히 반씩 섞는 타협이 아니라, 치우침을 경계하며 가장 옳은 자리를 찾는 균형이고, ‘용(庸)’은 평범함의 낮음이 아니라, 하루 반짝이는 영웅심이 아니라 지속되는 성실함에 더 가까운 말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사명은 방향을 가진 사랑이다
골로새서의 문장은 사명의 방향을 분명히 합니다. “나를 위한 성장”이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주어진 직분입니다. 즉, 사명은 내 내면의 만족을 증명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타인을 살리는 방향성을 띱니다. 그래서 섬김은 ‘내가 하고 싶은 만큼’이 아니라, 맡겨진 자리에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만큼’을 묻습니다. 이때 섬김은 감정의 고저에 좌우되기보다, 관계와 공동체의 필요를 읽는 책임으로 깊어집니다.
중(中): 가장 선한 자리는 극단을 거부하는 자리다
“中者至善也(중은 지극한 선이다)”는 말은 균형의 가치를 ‘무난함’으로 낮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은 가장 어렵고 가장 높은 자리입니다. 사람은 보통 극단에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더 강하게, 더 빨리, 더 크게. 하지만 극단은 종종 상대를 소모시키고 자신도 태웁니다. 중은 열심을 약화시키는 브레이크가 아니라, 열심이 사랑을 잃지 않도록 방향을 잡는 조향장치입니다. 진리를 말하되 사람을 잃지 않고, 원칙을 지키되 마음을 잃지 않는 자리—그 자리가 ‘지선(至善)’에 가깝다는 통찰입니다.
용(庸): 오래 간다는 것은 신실함의 또 다른 이름이다
“庸者能久也(용은 오래할 수 있다)”는 말은 ‘지속성’을 도덕의 핵심으로 끌어올립니다. 좋은 뜻도 지속되지 못하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됩니다. 약속이 자주 바뀌는 친절, 기분이 좋을 때만 제공되는 돌봄은 신뢰를 세우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오래가는 섬김은 화려하지 않아도 공동체의 바닥을 단단히 합니다. 바울이 말한 “말씀을 이루려 함”도 결국은 한 번의 결단이 아니라, 오래 유지되는 순종의 흐름 속에서 현실이 됩니다.
“지선하면서 능구하면 곧 중용”: 말씀의 완성과 삶의 지속이 만나는 곳
『심경밀험』의 결론은 단순합니다. 가장 선하면서 오래갈 수 있다면 그것이 중용이다. 여기에 골로새서의 직분 이해를 겹치면, 섬김의 윤곽이 선명해집니다. 말씀을 이루려는 사역은 뜨거운 순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또한 오래 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옳아지지도 않습니다. 선함(방향과 내용)과 지속(시간과 신실함)이 함께 갈 때, 섬김은 공동체를 살리고 말씀의 뜻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철학이 만나는 “인간다움의 공통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선하게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선함을 지치지 않게 지킬 것인가.
균형의 영성: 열심과 겸손, 확신과 배려 사이
사명은 자칫 자기 확신의 무기가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셨다”는 말은 때로 타인의 목소리를 지우는 명분이 됩니다. 이때 중용은 사명을 무디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명이 사랑을 잃지 않도록 지켜줍니다. 바울의 ‘일꾼’이라는 정체성은 권력이 아니라 섬김의 자세를 전제하고, 중용의 ‘지선’은 옳음을 내세우는 승리가 아니라 치우침을 경계하는 겸손을 요청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더 크게 말하기보다 더 정확히 듣고, 더 빨리 움직이기보다 더 오래 지키는 쪽으로 성숙해집니다.
오래가도록 선하게, 선하되 오래가게
골로새서 1:25의 직분은 “말씀을 이루기 위한” 위임이고, 『심경밀험』의 중용은 “가장 선하며 오래가는” 길입니다. 둘을 함께 놓으면 한 문장으로 정리됩니다. 맡겨진 사명은 공동체를 향해 선하게 흐르고, 그 선함은 지속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우리가 찾는 중심은 타협의 회색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 열정과 절제, 확신과 겸손을 함께 품어내는 밝은 중심입니다. 그 중심에 서는 삶이야말로, 말씀을 삶으로 번역하는 가장 견고한 방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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