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과 함께하는 나의 하루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로라 (시편 77:1).
- 다산, 어른의 하루
곤욕비우 취곤욕위우 영리비락 망영리위락 (困辱非憂 取困辱爲憂 榮利非樂 忘榮利爲樂, 격언련벽).
해석: 곤욕이 근심거리가 아니라 곤욕을 괴로워하는 것이 근심이다. 부귀영화가 즐거움이 아니라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진정한 즐거움이다.
- 평카박의 다짐
세상의 것을 잊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자.
- ChatGPT
부르짖음과 비움: 하늘은 듣고, 마음은 놓는다
삶이 벽처럼 느껴질 때, 어떤 이는 위로 향해 소리를 높이고, 어떤 이는 손아귀를 느슨히 하여 집착을 놓는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시편 77:1)와 “곤욕은 본래 근심이 아니나 곤욕을 근심으로 삼으면 근심이 되고, 영예와 이익은 본래 기쁨이 아니나 영예와 이익을 잊으면 기쁨이 된다”(困辱非憂 取困辱爲憂 榮利非樂 忘榮利爲樂)라는 두 문장은, 위로 부르짖는 신뢰와 아래로 비우는 무집착이 한 원을 이룬다는 사실을 함께 가리킨다.
1) 들으시는 분을 향한 ‘개인적 목소리’
시편의 반복 “내 음성으로”는 표준화된 의식이 아니라 관계적 호소를 강조한다. 부르짖음은 상황 통제의 실패를 인정하는 약함이 아니라, 나를 넘어선 귀(聽)에 기대는 용기다. “귀를 기울이신다”는 응답의 확신은 결과 보장이 아니라, 누군가가 지금-여기의 떨림을 듣고 있다는 관계의 확실성이다. 관계의 확실성은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제공한다.
2) 고통과 영예의 재해석
한자 격언은 관점을 전환한다. 곤욕과 굴욕은 사건 자체로서 ‘근심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근심으로 ‘채택’할 때 근심이 된다. 반대로 영예와 이익도 본성상 ‘기쁨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을 잊을 수 있을 때, 즉 소유와 평판을 자기 동일시의 토대에서 내려놓을 때 비로소 가벼움이 찾아온다. 고통의 무게와 성취의 달콤함 모두가 해석의 프리즘을 통과해 감정의 질로 번역된다는 통찰이다.
3) 울림과 여백의 상호작용
부르짖음은 비움을 가능하게 하고, 비움은 부르짖음을 맑게 한다. 마음을 가득 채운 계산과 체면은 음성을 탁하게 만들지만, 놓아버림은 음성에 진정성을 부여한다. 반대로, 들으시는 분에 대한 신뢰는 손을 펼칠 용기를 준다. 결과를 쥐어짜려는 집착이 약해질수록, 지금 필요한 한마디가 선명해진다. 이렇게 두 문장은 관계의 울림(聽)과 마음의 여백(忘)이 같은 축 위에서 서로를 밝히는 짝임을 보여준다.
4) 균형 있는 자유
현실의 곤욕은 통증을 일으키고, 영예와 이익은 실제로 유용하다. 그러나 통증이 곧 파멸은 아니고, 유용함이 곧 행복은 아니다.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것은 사건의 유무가 아니라 그것과 맺는 관계의 방식이다. 위로 향한 신뢰는 고통 속에서도 붕괴를 막고, 아래로 향한 비움은 성공 속에서도 목마름을 멈춘다. 삶의 중심은 결과의 크기가 아니라, 듣는 귀가 있다는 확신과 쥐던 것을 놓을 수 있는 자유가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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